AI를 사용하면 예전에는 한 시간이 걸리던 정보 정리가 단 10분 만에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남은 50분을 ‘빈 시간’으로 여기고 그 안에 다른 업무를 넣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일이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끝났으니 그 시간을 이용해 더 진행하는 것이 효율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패턴을 반복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AI로 각각의 업무는 빨라지는데도 하루에는 더 많은 일이 들어가고, 작은 문제 하나만 생겨도 전체 일정이 더 쉽게 흔들립니다. 속도가 시간을 만들어 내더라도 그 시간을 즉시 다른 업무로 바꿔 버리면 인간 쪽에는 여유가 남지 않습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남는 시간이 바로 ‘아직 사용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닷새 뒤가 마감인 업무의 중요한 부분을 첫날에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 수 있다고 해봅시다. 남은 나흘은 단순한 잉여가 아닙니다. 일을 실제 형태로 만들어 봄으로써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청한 사람과 이해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도 있고, 필요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차분하게 마무리하면 됩니다. 따라서 일찍 진행하는 것의 가치는 완료 시점을 앞당기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발견된 뒤에도 행동할 시간을 남겨 두는 데 있습니다.
이 차이는 간단한 일정에서도 드러납니다. 공항에 갈 때 이동 시간이 보통 한 시간 걸린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이 출발 정확히 한 시간 전에 집을 나서는 것은 아닙니다. 교통 지연, 탑승구 변경, 두고 온 물건 같은 일들은 미리 확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찍 도착했는데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면 그 여유 시간은 결국 사용되지 않은 셈입니다. 그러나 사용되지 않았다고 해서 가치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시간이 존재했기 때문에 예상 밖의 일이 생겨도 전체 계획을 무너뜨리지 않고 흡수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여유의 가치는 그 시간에 무엇을 했는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다른 행동을 선택할 수 있었다는 데에도 있습니다.
AI와의 협업에서도 같은 문제가 생깁니다. AI는 글의 초안을 만들고, 정보를 정리하고, 여러 선택지를 비교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약된 시간을 모두 추가 생성에 사용한다면 AI의 속도는 인간의 여유로 바뀌지 않습니다. 세 가지 아이디어를 열 가지로 늘리고, 조사가 일찍 끝나면 검색 범위를 더 넓히며, 문서 하나가 완성되면 곧바로 다른 업무를 추가합니다. 각각의 선택은 그 자체로 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효율 향상으로 얻은 시간을 계속 다음 처리 과정에 다시 투입하는 한 예상하지 못한 문제를 살피거나 방향 자체가 옳은지 다시 생각할 시간은 거의 남지 않습니다.
따라서 효율을 생각할 때는 ‘같은 시간에 얼마나 더 많이 했는가’와는 다른 척도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부분을 일찍 다루면 일의 진짜 어려움도 일찍 드러납니다. 어려움이 드러나면 계획을 바꾸고, 누군가와 상의하고, 조건을 확인하거나, 심지어 원래의 방법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쉬운 부분만 차례로 끝내고 어려운 부분을 마지막까지 남겨 두면 겉으로는 순조롭게 보이더라도 문제가 드러났을 때는 이미 바꿀 시간이 남아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속도는 처리량을 늘리는 데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더 일찍 만나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여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과 다르게 보입니다. 그것은 미래에 무엇이 일어날지 아직 모르기 때문에 용도를 정하지 않은 채 의도적으로 남겨 둔 시간입니다. 지금 모든 시간 단위에 역할을 부여하면 현재 계획에는 낭비가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래의 조건이 바뀌면 계획이 움직일 곳이 없습니다. 사용 가능한 시간을 일부러 모두 쓰지 않는다는 것은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대응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Sai*aus에게도 AI의 속도를 어떤 가치로 전환할 것인지는 중요한 설계상의 질문입니다. AI가 더 빨라졌다고 해서 인간의 판단까지 더 빨라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AI가 무언가를 일찍 정리할 수 있다면 사람은 전제를 살펴볼 시간을 더 얻을 수 있습니다. AI가 초안을 일찍 만들 수 있다면 곧바로 다음 초안을 대량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시 거리를 두고 다시 읽을 여지를 남길 수 있습니다. AI가 만들어 낸 시간은 더 많은 AI 활동으로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로도 바뀔 수 있습니다.
이것은 효율을 반대하는 주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속도를 통해 무엇을 얻고 싶은지 다시 생각하자는 주장입니다. 처리량을 늘리는 것이 목표인 경우에는 절약된 시간을 다음 업무에 사용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류가 심각한 결과를 낳는 업무나 조건이 바뀌기 쉬운 업무에서는 여유를 보존하는 것 자체가 결과를 지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는 시간을 항상 사용해야 한다는 것도, 항상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사용할지, 아니면 용도를 정하지 않은 채 보유할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AI 시대에는 일을 더 빠르게 만드는 기술뿐 아니라 속도가 우리에게 준 것을 모두 소진하지 않는 기술도 필요할지 모릅니다. 사용되지 않은 시간을 보면 우리는 그 안에 무언가를 넣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빈 공간이 있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을 때 움직일 수 있습니다. 효율 향상으로 얻은 모든 것을 새로운 업무로 바꾸는 대신 그 일부를 미래의 변화 가능성으로 남겨 둘 수 있습니다. 그러면 AI의 속도는 단순히 업무량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두르지 않고 판단할 수 있는 여유로 바뀝니다.
답이 아니라, 이해를.